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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의 글] 내비는 없지만 일단 떠나봅시다
작성일 :  2021-04-12 09:08 이름 : 지와감 심리상담센터

 

내비는 없지만 일단 떠나봅시다

 

글쓴이 : 내담자 P * 하님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하얀 화면의 압박을 이겨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워드 프로세서의 빈 화면에서 어서 뭐라도 채워달라는 듯이

커서만 깜빡거리는 상황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마다 예외없이 닥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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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매회 상담을 시작할 때마다 상담자의 기록지는 언제나 하얀 백지에서 시작된다.

내담자의 동의를 받아 기록하는 모든 내용들은 상담을 진행하는 50분 동안 매번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이고 모여 해당 내담자만의 파일이며 차트가 된다.

나는 201*년부터 지금까지 상담을 받아왔다. 중간 중간 쉬는 기간도 있었지만,

꽤 긴 상담횟수를 거듭했으니, 나의 상담기록 파일은 그만큼 두꺼워졌다.

그것을 볼 때마다 상담자 선생님과 내가 보내온 신뢰의 나날을 실감할 수 있게끔 한다.

선생님의 책상위에 있었던 백지들에 나의 마음들이 쌓이고 쌓였다.

나는 그 마음들을 이리 저리 보고 또 보면서,

그것은 내가 주인이 되어 내가 다스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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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을 받는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기대하곤 한다.

상담자가 상식을 넘어서는 특별한 통찰력이나 엄청난 전문 지식을 통해

내담자에게 규격화된 정답을 딱딱 제시해줄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는 현실과는 한참 다르다.

신처럼 전지전능하고 내게 필요한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상담자의 모습이란

세간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상담은 그렇게 일방적인 지시로

이루어지는 인생 첨삭의 과정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알았다.

 

상담의 기본은 상담자와 내담자 서로의 언어를 매개로 한 대화다.

대화의 본질은 쌍방향적이고 상호적인 의사소통이다.

내담자는 수동적으로 상담자의 말을 받아들이고 따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즉, 상담자처럼 내담자 또한 상담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변화의 과정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상담은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 경로를 따라가기만 하는 여행은 아니다.

상담자는 이 여행에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상담이란 도대체 어떤 성격의 여정인가?

내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상담이란,

상담자와 내담자가 한 팀이 되어 내담자 마음의 지도를 함께 만들며

차근차근 걸어 나가는 로드무비에 가깝다.

처음엔 지도가 없으니 어딘가에선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예기치 못하게 비바람이나 눈보라를 맞으며 다녀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역경을 거쳐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통찰의 순간이 주는 짜릿한 쾌감은,

그간의 고생을 전부 잊게 할 만큼 강력하다.

상담자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 내 앞길을 모두 꿰고 있는 내비게이션도 아니다.

그보다 상담자는 네팔의 ‘셰르파’와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셰르파는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는 등산가들을 안내하는 현지인을 일컫는데, 

이 비유가 상담의 한 부분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글을 쓰다 보니 하얀 망망대해처럼 막막해 보이던 화면이

어느새 까만 글씨로 빽빽하게 찼다.

이렇게 글을 한 편 써낼 때마다,

마치 먼 바다에서 팔뚝만 한 생선들을 잔뜩 실어 돌아오는 어부처럼

혼자 뿌듯함에 가득 차곤 한다.

상담 한 회기가 끝날 때쯤이면 백지였던 상담기록지 또한 검은 글씨로 가득 찬다.

대화가 유난히 많았던 날이면 기록지의 양이 앞뒤로 두 장, 세 장이 넘어가기도 한다.

그 모든 기록은 상담자와 내담자의 공동작업에 오롯이 쓰인다.

내담자 마음의 지도를 만드는 중요한 작업의 귀중한 자료로서.

 

나는 언제나 내가 갈 수 있는 상담실이 있기에,

누구에게나 두려운 세상살이에 용감히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백지의 기적’은 나뿐만 아니라 내담자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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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와감심리상담센터의 상담칼럼 공모행사에 참여한 글입니다.

글쓴이 P * 하 님의  동의를 받아서 게시하였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무단복제나 사용을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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